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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타임즈]중위선박사건-대일 민간 손해배상 성공사례|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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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1

중위선박사건-대일 민간 손해배상 성공사례


2014년 4월 19일, 상해해사법원은 진순통(陳順通) 후손들의 신청에 따라 저장성 마지산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의 상선미쓰이주식회사(商船三井株式會社, 이하 "상선미쓰이")가 소유한 선박 BAOSTEEL EMOTION을 압류했다. 상선미쓰이는 같은 달 23일 손해배상금 1.9억 위안과 소송비용을 전액 지급했고, 다음 날인 24일 법원은 선박압류를 해제했다.

 

1930년대 일제 침략기에 진순통의 선박 2척을 일본 기업이 임차해간 후 반환하지 않고, 전쟁 중 침몰됨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진순통의 후손 3대가 70여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마침내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낸 것이다. 이 사건은 '중위선박사건(中威船案)'으로 불리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진순통은 국민정부의 국영해운회사인 국민선운공사(國民船運公司)의 초대사장을 지낸 후, 1930년 9월 1일 중위윤선공사(中威輪船公司)를 창업했다. 그 후 6년 동안 '태평(太平)', '신태평(新太平)', '순풍(順豊)', '원장(源長)' 등 선박을 차례로 매입하여 총톤수가 2만톤에 달했다. 그는 중국 최초로 '선박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나중에 홍콩의 선박왕으로 불리는 전홍콩특구행정장관 동젠화(董建華)의 부친인 동호운(董浩雲)이 당시 진순통의 조수였다.


그런데 일본이 화북지역을 점령한 후, 일본군이 중국계 해운회사의 화북지역에서의 운항을 제한하자 중국계 해운회사의 영업이 곤란에 빠졌다. 진순통은 1936년 6월 16일과 10월 14일 일본 대동해운주식회사(大同海運株式會社)와 계약기간을 1년으로 한 선박용선계약을 체결하여 6,725톤의 '순풍'과 5,025톤의 '신태평'을 대동해운에 임대했다.

 

그 후 1937년 노구교사건이 일어나면서, 중국과 일본간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국민정부군은 진순통의 남은 '태평'호와 '원장'호 2척의 배를 징용하여 사용하다가 항로를 막아 일본군의 공격을 늦추기 위하여 각각 강음구(江陰口)와 영파만(寧波灣)에 침몰시켜 버렸다. 국민정부군은 일본계 해운회사의 선박도 징용하여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침몰시켰다.

 

한편 대동해운에 임차해준 2척의 선박은 기한이 만료되었는데 대동해운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진순통은 1939년 봄 일본으로 대동해운을 찾아갔으나, 대동해운으로부터 2척의 배가 일본 해군에 의하여 '법에 따라 포획'되었고, 대동해운도 도산 직전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진순통이 상해에 만든 선박수리소도 일본군에 점거되었고, 진순통의 해운사업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대동해운은 1940년 4월 9일 진순통에게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어 2척의 배를 반환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척의 배는 일본 정부가 1938년 8월 22일 '법에 따라 포획'하여, 소유권이 일본국 체신성에 귀속되었고, 다시 선박임대계약을 체결하여 대동해운에 임대하였으므로, 대동해운은 2척을 사용하면서 임대료를 체신성에 납부한다고 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초 진순통은 중화민국부일(赴日)대표단과 주일연합군사령부에 서신을 보내 2척의 배를 돌려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일연합군사령부는 1월 14일과 17일에 회신을 보내 '신태평'은 1938년 12월 21일 홋카이도에서 암초에 걸려 침몰했고, '순풍'은 1944년 12월 25일 남해에서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했다. 진순통은 2월 15일 연합군사령부에 선령과 톤수가 비슷한 동급의 선박으로 대체하여 반환하도록 조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연합군사령부는 3월 24일 회신을 통하여 연합군사령부에서 일본 정부가 전쟁기간 중에 징용한 선박을 원주인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한 바 있으나, 대체선박을 제공하는 것은 명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냈다.

 

한편 3월 22일 중화민국부일대표단이 연합군사령부에 선박이 이미 침몰하였다면 이를 인양하여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연합군사령부는 6월 9일자 회신에서 '신태평'은 1938년 침몰한 후, 일본체신청 선박관리국이 인양을 포기했고, 일부 회수된 선박잔해는 이미 요코하마의 선박해체업체에 매각되어 사실상 신태평호는 인양할 것이 남아 있지 않으며, 순풍호는 일본 해역 외에서 침몰하여 관할 범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양 요구를 거절했다.

 

이로 인하여 병석에 누운 진순통은 1949년 11월 14일 결국 사망했다. 임종 전에 그는 장남 진흡군(陳洽群)에게 반드시 2척 선박의 손해배상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본내에서 침몰한 중국 선박에 대한 반환과 인양작업은 195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8척은 반환되었고, 7척은 수리 후 반환될 예정이었다. 다만, 일본 해역내에서 침몰했으나 인양할 수 없었던 21척과 해외 해역에서 침몰한 69척에 대하여는 미국과 소련의 의견대립 등으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관련 업무가 모두 중단되어 버렸다.

 

1958년 진흡군이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2척 선박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기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가장 먼저 대동해운에 연락했다. 그러나 대동해운은 배를 일본 정부가 '포획'해서 가져갔으므로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물으라고 답변했다. 진흡군은 196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외무성, 대장성, 체신성을 찾아다니며 2척 선박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청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소위 '조사'를 거쳐 "관련 자료를 확인한 결과, '포획'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1964년 4월에는 대동해운이 일본해운주식회사에 합병되는 일이 일어났다. 마음이 조급해진 진흡군은 일본변호사를 선임하고, 일본변호사의 의견에 따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민사조정을 신청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동경간이재판소에서 26회에 걸쳐 조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는 2척을 '포획'한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상을 거절했다.

 

1970년 4월 25일, 진흡군은 동경지방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수십 차례의 심리를 거쳐 1974년 10월 25일 판결이 내려졌다. 결론은 '시효로 소멸했다'는 것이었다. 일본변호사들은 항소를 권유했지만, 소송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진흡군은 상소를 포기했다. 10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회수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렇게 끝났다.

 

그런데 중국에서 1987년 1월 1일 반포된 민법통칙이 진순통의 후손들에게 다시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최고법원이 같은 해 5월 사법해석을 통하여 "민법통칙 반포 전에 민사권리를 침해받았으나 처리되지 못한 사건은 민법통칙 반포 후 2년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효력이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제는 시효에 관계없이 중국 본토에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흡군은 1985년 8월에 중풍으로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그의 장남 진진(陳震)과 차남 진춘(陳春)이 나섰다. 이 소송은 국내외 법조계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대륙, 홍콩, 대만, 미국의 저명한 변호사와 법조인 56명이 변호인단과 고문단으로 참가했다. 여기에는 중국율사협회회장 런지성(任繼聖),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출신의 북경대학 왕테야(王鐵崖) 교수 등 민법, 해상법, 국제법의 전문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연구와 검토를 거쳐 1988년 12월 31일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몇 가지 이슈에 대하여 검토를 거쳐 소송방안을 확정했다.


첫째, 제소법원은 중국내에서 관할권 있는 법원들을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상해해사법원으로 결정했다. 상해해사법원은 통상적으로 3명으로 합의부를 구성하는데, 이 사건에 대하여는 5인의 재판관으로 합의부를 구성했다.

둘째, 피고를 일본 기업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대동해운은 일본 정부가 '포획'했다고 말했지만, 일본 정부는 '포획'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대동해운이 진순통을 기망한 사기행위를 이유로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동해운은 1964년에 이미 일본해운에 합병되고, 일본해운은 다시 1980년대에 일본 NAVIX Line에 합병되어, NAVIX Line을 피고로 하였다. 그러나 소송진행 중인 1999년 4월 NAVIX Line은 다시 일본의 제2대 해운회사인 상선미쓰이에 합병되어, 최종적으로 상선미쓰이가 피고로 확정되었다.

 

셋째, 원고는 처음에 중위윤선공사로 하였으나, 소송진행 과정에서 중위윤선공사는 법인이 아니라 개인사업체였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진순통의 상속인이 원고로 되어야 했다. 원래 1949년 8월 8일 진순통은 임종 전에 배 2척의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를 장남 진흡군에게 준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으므로 진흡군이 상속인 자격으로 원고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돌발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진순통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나머지 자녀들 중 일부가 유언장은 진흡군에 의하여 위조된 것이므로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하여 1996년 6월 상해중급법원의 제1심에서 승소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상해고급법원의 제2심에서는 유언이 유효라고 다시 판결했지만, 이로 인하여 약 2년가량 소송진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소송진행 중에 진흡군도 1992년 4월 사망하여, 원고는 최종적으로 진흡군의 상속인인 진진과 진춘으로 확정되었다.

 

넷째, 중국과 일본은 1972년 9월 29일 정식 수교했는데, 중일양국의 공동성명에서 중국 정부는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피고의 항변 초점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본건 배 2척은 일본 해군이 포획하여 소유권이 일본 정부로 이전되었으므로, 배상책임을 일본 정부가 부담하여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전쟁배상책임을 포기하였으므로 일본 기업이나 일본 정부는 모두 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고 측에서 배 2척이 일본 해군에 포획되어 소유권이 일본 정부로 이전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진순통도 일본에서의 재판에서 일본 정부가 포획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자료도 제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일본 정부가 이미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조사를 거쳐 이미 "포획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이제와서 이에 반하는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해해사법원은 5차례의 개정을 거쳐 2007년 12월 7일, 상선미쓰이에게 일화 2,916,477,260.80엔(인민폐 약 1.9억 위안)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10년 8월 6일 상해고등법원은 원판결을 유지하여 판결이 확정되었다. 피고가 재심을 신청하였으나, 최고법원은 기각했다. 첫머리에 언급한 선박압류가 일어났고, 상선미쓰이가 압류를 풀기 위해 전액을 지급한 것이다.

중국도 일제 침략기간 동안 731부대, 위안부, 강제노동 등 많은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비록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중국도 많은 피해자들이 일본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중위선박사건은 유일하게 중국 국내에서 제기된 사건이며, 성공적으로 배상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 김종길 구성원변호사

    김종길구성원변호사

    jgkim@dongin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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